현대미술의 개념은 작가의 사유에서 출발한다. 내밀한 사적 기억과 정서적 반응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담론이나 철학과 조우해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고, 관객과의 소통을 통해 다시 어떤 개념의 영역으로 환원된다. 차기율은 자연물에서 얻은 무작위적 형태와 명료한 드로잉 작업 등을 통해 현란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생성하는 작품세계를 선보여 왔다. 미술작품의 형식미에서 발산하는 시각적 쾌의 본령을 중시하는 그가 바라보는 미술은 존재와 부재, 생성과 소멸같이 변화하는 어떤 흐름까지도 이입되어 있는 것이다. 엄격한 원칙과 유연한 수용의 역설적 공존은 작가로서의 정신노동에서 얻은 어떤 가치의 구현을 위해 복무한다.

공간화랑에서 10월 30일까지 진행한 개인전, <세 개의 장소 Three Places>에서 차기율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원형’에의 접근을 시도했다. 그 원형이라는 것은 직관의 영역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지향점이기도 하고, 부유하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자신이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고학과 같은 이종적 영역의 수용은 그가 접근을 시도하기 위한 실천적 키워드이기도 하고 일종의 구도 과정이기도 하다. 그가 세 개의 장소에서 발굴해놓은 것은 무엇인가?


발굴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편이지만, 동시에 원형과 뿌리 같은 것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 있다. 오늘의 나 자신에 닿아 있는 먼 과거의 불특정한 시점을 현재로부터 추적하고, 그 뿌리에 함께 존재했던 것들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것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출현하는 동시대의 이 생경한 모습은 이면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무관심을 감추고 있다.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삶에 대한 신중한 태도나 진지한 자세 같은 것들 또한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발굴 작업은 오늘날 너무나 덧없이 사라지고 있는 가치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정량적 계산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고, 이미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기억과 추억을 역순으로 추적해가는 이 과정은 동시대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규명의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세 개의 도시와 발굴지는 당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화성시 발안의 주택은 내가 태어난 집이다. 슬라브 지붕으로 어색하게 보존된 그 집은 주변이 모두 신도시로 개발된 지역 한쪽에 생경하게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산은 반 토막이 나면서 도로가 깔렸고, 갯벌은 매립되었다. 그 집이 있는 마을도 조만간 대규모 개발이 진행될 것이 자명한데, 주변을 가득 메운 대규모 주거단지들의 주민들을 위한 유락시설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 집 앞마당에서 발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기서는 옹기와 유리 파편, 단추 등이 발굴되었다. 한적한 시골에서의 소시민적 삶의 자취들을 상징하는 것들이 출토된 것이다.

나는 열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해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기를 보냈고, 지금도 서울에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형편이었기에 전형적인 도시 서민층의 삶을 살았다. 일천한 기반으로 서울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 가족은 10년간 서른 번이 넘는 이사를 다녔다. 이사를 마쳐놓고 짐을 풀면서도 곧 다시 짐을 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달동네와 판자촌 등은 삶을 부유(浮游)하는 내 터전이었다.

통의동 한옥은 내가 성장한 도시인 서울에 존재하는 한 장소다. 통의동은 과거 창의궁 터이자 영조의 잠저가 있었으며, 추사 김정희가 문인들과 교류를 즐겼던 곳이고,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동시에 궁궐의 서편이라는 이유로 고관대작들보다는 중인 계급이나 궁궐에서 근무하는 하위 계급 사람들이 가난한 삶을 영위하던 곳이다.

내게 서울은 도시 빈민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나가는 보편적 장소로서의 이미지다. 통의동의 발굴지 역시 특정 장소의 역사적 맥락보다는 서울을 상징하는 어떤 매개로서의 속성이 더 강하다. 통의동 발굴은 이 세 개의 발굴 프로젝트 중 가장 먼저 진행된 곳으로 오래된 한옥 마루에서 시도되었다. 사실 발굴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상에서 지하로의 이동을 뜻하는데, 통의동 작업은 지하가 아니라 지표 위에서 축적된 과거의 두께를 역추적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발굴이 아닐 수도 있다. 나는 한옥의 아궁이와 연도(煙道) 등을 찾아냈고, 많은 부산물을 얻었다.

배다리는 내가 대학을 다녔고 젊은 날 많은 시간을 보낸 인천을 상징하는 장소다. 과거 인천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해안의 신도심이 부상하는 동안 퇴락을 거듭해 지금은 흡사 1960, 1970년대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배다리의 근곀測六瑛?가치로 인해 현 상태 보존이 주장되고 있는데,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 계획 및 무분별한 전체 개발 계획과 상충하면서 여러 가지 문화적 맥락이 생산되고 있기도 하다.

여러 복잡한 이유로 나는 도피하듯 인천으로 가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고, 이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사실 내게 인천은 행정적 경계로 구분되는 특정 도시의 느낌보다는 그저 서울로 상징되는 삶의 터전, 어느 변방에 존재하는 부유의 터전 중 하나로 생각되는 곳이다. 배다리 발굴은 공원 내 집터를 대상으로 진행했다. 그곳은 도로 건설을 위해 철거된 집이 있던 곳인데, 거기서 목편이나 석탄 잔해 등을 발견했고, 보일러나 화로의 흔적을 추적하기도 했다.




당신의 발굴이 고고학에서 행하는 발굴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예술가로서 어떤 새로운 형태를 발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는 않았나?
문학을 좋아했고, 동시에 생물학과 고고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술 외 다른 분야의 지식들은 나를 강렬하게 자극했고, 결국 내 작업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되었다. 나는 예술을 내 자신을 구축하는 과정이자 내가 만드는 하나의 세계로 인식한다. 예술 그 자체의 언어로 완성된 형태를 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작가로서의 내 자신의 정신을 담아내는 어떤 형식이며, 그 결과는 결국 내 정신 활동의 산물이다.

내가 학습하고 사용하는 고고학적 형식은 방법론적으로는 고고학의 발굴 과정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내 발굴 목적은 고고학에서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르다. 나는 내 예술의 틀 안에서 유효한 어떤 체계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 그것을 사용하는 예술가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어떤 소우주를 구축하는 사람이며, 그 안에서 서식하는 사람이다. 그 소우주의 형식적 특성이 그 소우주의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결국 그 우주를 채우는 것들은 작가의 정신적 사유의 결과물들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에 여하한 것들도 존재할 수 있고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내 작업 속에 존재하는 소멸의 메커니즘이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작업이 내가 구축한 하나의 소우주라면, 생성과 순환 그리고 소멸의 과정이 존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형식에 담긴 정신적 가치이지 그 형식 자체가 아니다. 작품의 본질은 형식 이면에 존재하는 작가의 사유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 작품들이 점차 소멸되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영원한 보존을 목표로 하는 고고학적 발굴과 내 예술 행위를 구분 짓는 명백한 경계이기도 하다.

작품의 형식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사실 나는 미술작품의 형식미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떠한 경우든 형식에 담긴 정체성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나는 과거 민중미술 작가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직설적인 형식적 특징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나 역시 당시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주는 아픔을 안고 있었고, 숨기고 싶은 트라우마가 있었으며, 그러한 것들로부터 촉발된 분노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투쟁과 저항은 나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의 실천적 과제였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 행위의 귀결점은 민중의 시각적 쾌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미술의 원론적인 형식이나 미학적 영역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제아무리 명백한 정언도 미술작품의 본질을 뒤흔들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품의 형식적 속성은 어디까지나 그 속에 담긴 정신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 활용되는 것이지, 그 가치 자체를 압도할 수는 없다. 본질 구현을 위해 가장 적절한 형식적 특징을 적용해야 하고, 그것은 작가가 구축하는 세계의 완성도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 작가가 미술이 가진 형식적 함정과 그것에 결탁한 미술시장의 위력 앞에 너무나 무력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를 비롯해서 당신의 작품은 판매되기 어려운 것이 많다. 작품을 판매하지 않고 작가로 존재할 수 있나?
내 작품이 컬렉터의 기호나 보존 조건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다 판매된 소수의 작업도 우연에 가까운 일이다. 구태의연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강한 신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작품을 하는 행위 자체가 내 삶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이고, 거기에 맞춰 생활환경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내가 작업하는 행위에 크게 개입하는 것이 별로 없다. 스스로 수립한 몇 개의 원칙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고수하는 편이다. 이러한 노선을 선택한 이상, 나는 미술시장에서의 성공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여유 같은 것들을 내심 포기한 지 오래다. 이런 생활은 다분히 내 체질과도 부합한다. 과거 아트페어와 같은 장소에 한두 번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는데, 작품에 환금 가치를 매겨 노골적으로 내어놓는 그 현장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마치 이방인이 되어 주변을 서성이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체질에 관한 문제일 뿐, 시장의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다양성이 생명이다. 작가라는 존재를 어떤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장의 순기능을 활용하고, 거기서 작가로서의 존재성을 유지하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정량적으로 측정된 가치에 작가로서의 정신적 가치를 함몰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만연한 사회에서 시장에서 제공하는 금전적 혜택을 배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작가로서 존재하기 위해 그러한 물신적 가치에 수용당하지 않도록 저항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공간화랑 전시를 통해 동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공간화랑에서 개최하는 전시의 대주제가 흥미롭게도 ‘담론의 구축’이다. 작가로서 새로운 상상력을 찾고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는 것은 내가 언제나 품고 있던 의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전시를 위해 행한 발굴 과정 또한 그러한 모색을 위한 행위일 수도 있다.

내가 이번 전시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것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어떤 ‘원형’에 대한 접근이다. 그 원형이란 것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직관의 영역 깊은 곳에 있는 알 수 없는 지향점이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다. 내 예술은 어쩌면 그 원형 탐색의 과정일 수도 있는데, 그 탐색은 결국 내 정신 성찰의 과정이다. 이러한 성찰을 수행하는 데 자양분이 되는 것은 결국 다른 종류의 원형들이다. 문학이 그러했고, 고고학이 그러했으며, 수많은 다른 영역의 체계가 그러했다. 다른 종류의 기초 학문들에 대한 이해와 이종적 교배는 앞으로도 내가 견지하게 될 정신적 자세이며, 내 미래 작업 세계를 열어나갈 실천적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내 거짓된 욕망을 걷어내고 순전한 내면의 욕망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잠시 머물다 가는 삶을 거짓된 욕구로 채워나간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1. Cha Ki-youl, Self-portrait
2. Three Places,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Space, mixed media, size variable, 2009
3. Three Places(Sangsinri excavation diary), mixed media, size variable, 2009
4. Three Places(Baedari excavation diary), mixed media, size variable, 2009
5. Three Places,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Space, mixed media, size variable, 2009
6. Three Places(Tongui-dong excavation diary), mixed media, size variable, 2009

 
일시 및 장소  10월 4일 오후 2시 공간 사옥
인터뷰 고원석 공간화랑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