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사고, 직관적 일탈
현실에 직접 발을 들여놓았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었다. ‘2.6평방미터의 집’ 에 선보인 최소한의 집 세 채와 10여 개의 모형, 드로잉 작업이 그것이다. 일상적 사물과 언어를 중심으로 미술과 타 분야의 관계를 탐구하던 안규철이 이번 개인전에서는 건축과 도시의 접점을 탐색하고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직설적인 발언이다.

20대의 그는 ‘현실과 발언’을 비롯해 현장을 지키는 작가이자 미술 전문지 기자였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격동기에도 그의 작품은 오히려 따뜻했다. 그는 현실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살짝 비껴서 보여주기를 즐겼다. 뒤늦은 독일 유학생활 중에도 그는 유럽의 미술 현장을 국내에 소개하는 기자이자 일상적 오브제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였다. 그는 사회 비판적 의식과 문학적 감수성을 토대로 오브제 작업과 텍스트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사물에 투사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와 사람들의 소망, 좌절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뜨거운 투사도, 냉철한 모더니스트도 아니다. 오묘하게 뒤섞인 중간적 존재다.
 



오랜만의 개인전이다. 좀 다른 면모가 보인다.
예전부터 문학과 미술 사이의 접점을 발견하고자 했고, 일상적인 사물/도구와 미술 사이의 관계성에 깊게 천착하기도 했다. 미술 안에서가 아니라 미술 밖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했다. 이번 전시도 미술의 경계 부분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기존 작업의 연장이다. 이번에는 건축적인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왜 이 시점에 건축인가?
누구나 자기 공간에 대한 소망이나 꿈이 있다. 다락방이나 책상 밑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처박혀 있는 등 ‘내 공간’에 대한 본능적이고 소박한 열망을 대부분의 사람이 품고 있다. 이 작업은 그런 일반적인 공간에 대한, 공간을 소유하겠다는 소망에 대한 몇 가지 실현 가능한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 도시 속의 인간의 거주 문제를 거론하는 것인가?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는 부동산 열풍이 생겼고, 타워팰리스 같은 고층 아파트가 증가하고 있다. 제한된 땅 위에 공간을 확장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통해 최소한의 크기를 제안함으로써 거주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다.

또 다른 배경은 도시에 방치된 사람들, 즉 노숙자들에게 최소단위의 이동 가능한 숙소를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생각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쓰다 버릴 수 있는 골판지 집도 제안했다. 생각을 진전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개의 모델을 제작했지만, 사실 이것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을 디자인하고 전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해야 되는 일이다. 최근 우리가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는데, 정작 논의의 중심에서 빠져 있는 ‘공공성’에 대한 부분을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선보였던 ‘사물’혹은 ‘집’작업보다 더 직설적인 발언이다.
이 작업의 시작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에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한 사람들의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작업의 매우 중요한 언어적 요소다. 책상, 의자, 문, 숟가락, 망치 등 필요에 의해 사람이 만든 것, 인간의 삶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읽힐 수 있는 일상 오브제들이 일종의 텍스트와 동일하다는 발견이 이 작업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샘터화랑(1992)과 학고재(1996)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계속된 고민이 있다. 당시 나를 따라붙던 타이틀은 ‘개념미술가’였다. 내가 마치 퀴즈 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처럼, 사물의 상태를 왜곡시키고 변형시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맞혀보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이다. 물론 1960~70년대 개념미술이 하나의 미술사조로서 내게 영향을 준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작품이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호흡하려면, 대상물이 조각대에 놓여서 사람들이 작품 주위를 돌며 ‘이것이 뭘까,’ ‘작가가 무슨 얘길 하는 걸까’를 질문하게 만드는 것보다, ‘작품 안으로 관객이 직접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49개의 방>(로댕갤러리, 2004)이다.

당시 큰 규모의 공간이 주어졌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하든 ‘네 맘대로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예전처럼 건축적 요소를 차용하는 작업이 아닌 건축가처럼 건축적인 공간을 만들어본 것이다. 매우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만들고, ‘이런 공간이라면 어떨까’라고 제안해 보았다.

일상의 부재에 대한 다양한 층위가 읽힌다.
작품이 작가의 의도와 함께 여러 개의 다른 층위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작품이 단 한 번만 읽히고 수명을 다한다면 그것은 너무 소모적인 일이다. 계속 다르게 읽힐 수 있고, 개별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메시지가 발견될 수 있도록 복합적인 층을 갖게 하는 것은 작품을 안개 속에 넣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생각을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곤 한다. 우선 우리는 논리적인 개념의 사다리를 가지고 어느 단계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그 다음엔 그 사다리를 버리고 거기서 추락하든지 날아가든지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여전히 그 사다리를 붙들고 서서 ‘나는 논리적으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아예 개념의 사다리 없이 바로 점프를 해버리겠다는 것도 안 될 말이다. 개념의 사다리를 차곡차곡 밟아온 예술가는 전시로 날아가 봐야 한다.

이번 전시도 전보다 몇 가지 층위가 더 있다. 미술을 가지고 당신들이 모르는 어떤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을 털어버리고 모두가 다 경험하는, ‘이런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꿔왔던, 그리고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어디라도 갖다 놓을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당신과 소통하겠다는 의도가 강하다.

미술작품을 갖고 무슨 상품을 만든다거나 하는 의도는 없다. 이번 전시에서 심각한 철학적 질문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것을 걷어 내보는 게 중요했다.



서둘지 않고 작가적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작품으로 풀어내는 듯 하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이나 시장의 요구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에 관심이 적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남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을 하고, 좀 더 좋은 후배 작가들을 배출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로서 내 활동에 의미가 있으려면 전업작가로 살며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그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것은 상업적인 작가가 못된 것에 대한 변명이거나 ‘나는 이렇게 계속 가겠다’는 개인적인 신념일 수도 있다. 혹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의 행로 같은 것이기도 하다. 나 같은 경우가 많지 않다면, 내가 하는 일이 별 볼일 없더라도 그 지점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다양한 지형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난 이쪽으로 가야 되겠구나’라는  그림이 나오지 않겠나. 이 이야기는 내가 한 곳에 머무르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계 안에서 이런 자리도 있고, 저런 경계 지점도 있다는 것을 내가 강조해서 보여줘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작가로서 고민하고 있는 동시대성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이상주의자는 못되는 것 같다.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갖고 이것을 세상에서 관철시키고 구현하기에는 너무 소심하다고 해야 할까. ‘이건 안 되는 거야’라고 너무 쉽게 포기한다고 할까. 또는 사람에 대해서 더 이상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진보주의자의 태도는 갖고 있다. 지금 내 모습이, 위치가 마냥 좋으니 하던 짓만 하자고 한다면 그건 너무 인생을 싸게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의문하고, 아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활 양상 속에 빠져 있는 부분을 계속 찾고, 결핍과 부재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업을 그만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젊은 후배 작가들의 재기발랄하고 활기에 넘치는 작품들을 보면 ‘아, 이젠 무뎌지는 사람이 현장에서 조금씩 발을 빼는 수밖에 없구나’를 매일 느낀다.



최근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대해 미술의 본령이 남아 있는가, 가벼운 아이디어에만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예전에 비해서 젊은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진 지금의 미술 환경을 만드는 데 어쩌면 나 같은 사람도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미술계에는 작가적 성장에서 위계질서 같은 것이 분명 있었다. ‘어느 단계의 작가’라는 위계가 분명했다면, 나 역시 ‘예술에 무슨 위계가 필요하냐’며 기존의 규범과 룰을 깨고 공격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유학에서 돌아와 활발하게 움직일 무렵 선배 작가들이 당시의 상황을 상당히 우려하면서 나를 포함한 당시의 ‘요즘 애’들이 머리만 갖고 작업을 할 뿐, 예술가의 노동이나 시간 등은 경시한다는 얘기를 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것에 저항했다고 할 수 있고,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 물론 지금 동시대 작가들이 내공의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조급하고 금년 아니면 내년에는 당장 무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시대적인 환경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우리 선배 세대가 내 세대의 도전과 실험에 대해 ‘너희들은 뭘 몰라서 한참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경계하고 비판했던 것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젊은 작가들에게 당장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좀 더 오래가는 작가가 됐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려면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유적을 탐사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조명되지 않은 경계 바깥쪽을 향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미술계의 문제는 젊은 작가들이 대안공간이나 상업화랑이 생성한 윤곽 안에서 어딘가 정착할 자리를 찾아 방황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야를 경계 바깥쪽으로 돌려 새로운 길을 찾아내지 않으면 동어반복밖에 될 수 없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은 더욱 과감한 실험과 도전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엄청난 야심이나 포부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잘나가고 있는 작가들과 반대로 가야 하니까. 나도 계속해서 다른 생각들을 하고자 해왔다.

건축가, 디자이너의 경험을 작업에 끌어들여보니 어떤가?
재작년에 도시갤러리 지명 공모에 당선돼 공공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을 좀 더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있다. 계속 많은 생각이 그쪽으로 가고,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과정이 최근 내 관심사 중 하나다. 이번 작품은 그 연장으로 사이트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가능한 해법들을 리스트업하고, 그것들의 실현 가능성을 체크하고, 불가능한 것은 삭제해보니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작업 방식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나한테 편하고 유리한 것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면, 그 속에서 건축도 아니고 조형도 아닌 뭔가 변형된 이상한 것이 나오지 않겠나. 그리고 그것이 잘되면 우리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전시는 2~3년의 공백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전시 : ' 2.6 평방미터의 집 ' / 장소_ 공간화랑 / 기간_2009년4월26일까지 (PM 7:00)
 
 
인터뷰 박성태 편집장사진 권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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