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역사를 보여주마 - 책꽂이에 관하여

 

(이미지출처 : flickr)

여행을 가면 내 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을 자게 된다. 숙박시설에서 제공하는 가구는 거기서 거기. 이용객의 낯선 기분을 좀 편안하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는 곳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침대나 옷장, 작은 서랍, 물컵 따위를 놓는 탁자, 그 정도다. 실제로 여행객도 그 이상의 가구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은 캐리어에 들어갈만큼의 짐을 싸들고 여행을 왔을테니, 서랍이나 옷장을 넘치게 채울리 없다. 한 두달 체류하면서 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를까, 그 정도 머무는 수준이라면 '내 방'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어쨌든 '내 방'의 가구와 '여행 떠나서의 방'에 있는 가구. 집에 돌아와서 퍼뜩 알아차리게 되는 내 방의 가구는, '책꽂이'이다.
 
정기적으로 버리지 않는 이상 조금씩이라도 불어나는게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종이뭉치들'은 시간을 두고 점점 늘어난다. 전자제품을 사게 되면 설명책자가 딸려온다. 동네의 중국집과 치킨집의 전화번호들이 정리되어 있는 자그만 전화번호부도 어딘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여행 떠난다고 샀던 지도책이나, 학교 졸업앨범, 영어사전, 이면지 뭉치들과 A4 클리어파일, 명함 정리집 등이 책장 귀퉁이에 있다. 심지어는 CD나 DVD도 있을 것이다. 책꽂이는 방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창고며 친구다. 그 방의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이며 가장 눈에 안 띄는 존재이기도 하다. 방의 벽이자 독립적인 공간이다. 확실히 말해 '책꽂이', 혹은 '책장'은 '내 방'을 '내 방'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몇몇 소설과 영화 속에서 '책꽂이'는 재미난 역할을 한다. 주인공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며, 작품 속 세계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떤 소설을 가장 그 소설답게 만들어주었던 책꽂이. 그 영화의 한 장면을 가장 그 영화스럽게 드러낸 책장. 처음에는 내 방의 책꽂이처럼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시 그 작품을 들여다 보면서, 재기 넘치는 여러 형태의 책장과 책궤, 책을 놓아두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와이 슈운지의 대표작 <러브레터>는 어떠한가? 부옇고 밝게 빛나는 도서관 창가와 남자배우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몇 년전 개봉했던 영화 <범죄의 재구성>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등 여러 한국영화에도 멋진 서가가 등장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과 서가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인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은 읽는 내내 독자들이 중세 장서관의 책꽂이 이미지를 상상하게끔 하고,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높고 웅장한 서가는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책꽂이를 이야기하자면 서재나 도서관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되지만 그 부분은 추후 거론하기로 하고, '책장, 책궤, 서가'에 관해 수다 떨 수 있는 세 작품을 골라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소설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소설 <바람의 화원>의 작가 이정명은 2006년 블록버스터급 한국형 팩션(Faction) <뿌리 깊은 나무>를 선보였었다.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는가>라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공연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으로, 한글 창제의 숨은 이야기를 빠른 전개와 치밀한 구성으로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글과 경복궁,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금서'를 보관하는 비서고에 신기한 책장이 등장한다.
 
소설 속 주인공인 겸사복 채윤은 궁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인해 궐 이곳저곳을 조사한다. 단서를 추적하던 중,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던 비서고에서 사건의 열쇠가 되는 금서인 '고군통서'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다. 
 
「 적막을 깨고 천장이 무너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서가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줄지어 선 서가들이 저마다 살아있는 양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서가들 사이에서 채윤은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귀신들린 책들의 기괴한 조화인가? 저주받은 책들의 망령인가? 두 발이 얼어붙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
 
  사내는 기이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기이하다 함은 의자 양 옆에 달린 둥근 수레바퀴 때문이었다. 양쪽 팔걸이에는 언뜻 보아도 스무 가닥 가까운 밧줄이 묶여 있었다.
 
  그제야 천지가 무너지듯 구르릉대며 움직이던 서가의 비밀을 알 것 같았다. 천장에는 여러 개의 도르래가 밧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사내가 특정 밧줄을 당기면 연결된 도르래와 연결된 서가가 움직이는 장치였다. 서가 아래쪽의 단단한 박달나무 바퀴는 길게 홈을 판 활대 위에 높여 잘 구를 수 있었다.
 
  ......
 
  궁인들은 그를 떠다니는 귀신이라 했고 움직이는 서가를 귀신의 곡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귀신의 조화란 없음을 채윤은 두 눈으로 다시 확인했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바퀴에 의지하고 있엇던 것이다.
 
  ......
 
  사내가 다시 밧줄을 당기자 서가들이 원래 자리로 구르릉 구르릉 돌아갔다. 현란한 서가들의 움직임에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마침내 서가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 가지런하게 줄을 맞추었다.」
 
불길한 책을 모아둔다는 비서고. 그 비서고를 지키는 사내인 장서관 윤후명은 다리에 장애를 갖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장영실과 이천, 박연, 정인지 등 실용파 학사들이 개혁군주 세종과 머리를 맞대던 시대를 책꽂이로 표현하고 있다. 의기와 천문, 과학에 대한 갈증과 기술에 대한 탐구는 세종이 펼치려던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고, 움직이는 서가는 그 기술이 구현한 장소였다. 장서관 윤후명은 걸을 수 없었지만 두 발로 걸을 때보다 더 능숙하게 서가를 움직였다. 그가 관리하는 비서고는 궐 안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였으나 소위 '금서'라 낙인 찍힌 책을 살피고 더 깊은 고찰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작가가 상상한 '움직이는 서가'는 세상과 백성들을 위해 고민한 세종과, 그를 둘러싼 경학파 학자와 실용파 학자들의 갈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뛰어난 기술이 궁 안 구석진 곳, 귀신의 소문이 도는 곳에 숨어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2 소설 <달의 궁전>

  
<뉴욕 삼부작>, <미스터 버티고>, <거대한 괴물>, <환상의 책>, <우연의 음악> 등 재미난 이야기 속에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매지컬 리얼리즘 작가 폴 오스터. 그의 소설 <달의 궁전>(1989)의 도입부에는 '책궤'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 속에서 젊은 주인공 마르코 스탠리 포그는 1천권이 넘는 책들과 살고 있다. 그 책들은 외삼촌 빅터가 30여년간 모아온 것으로, 조카에게 어느날 충동적으로 책이 담긴 상자 모두를 선물한다. 포그는 다시 빅터에게 되돌려 줄 요량으로 그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는다. 다만 그 상자를 가구로 유용하게 쓴다. 그러나 외삼촌은 세상을 떠나버리고, 포그는 그를 떠올리며 상자를 하나씩 열어 책을 읽는다.
 
「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파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 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 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

  내가 빅터 삼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
 
포그는 외삼촌 빅터의 죽음 이후, 가구로 사용하던 책 상자를 하나씩 열어 책을 읽어 나간다. 그 한 상자에 채워진 책들을 만드는데 몇 그루의 나무가 들어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가로, 세로, 높이 모모 센티미터일 그 상자는 주어진 부피만큼 책을 삼키고 있었다. 책은 주인공이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역사를 간직하던 중이었다. 침대나 테이블로 이용되던 책 박스들은, 포그가 빅터를 애도하는 작업을 위해 기꺼이 열렸고, 빅터가 30여년간 쌓아올렸던 시간들을 다시 재생시키도록 도와주었다. 작가 오스터는 어쩌면 '인쇄물'이 가진 물성의 힘을 이 장면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은 책과 책꽂이가 무엇인지, 근원적인 물음을 하고 있는듯 하다.
#3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
 


빈센트 워드 감독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 What Dreams May Come>(1998)에도 매혹적인 서가가 나온다.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주인공 크리스는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죽게 된다. 크리스는 사후세계에서 환상적인 색채와 평화로움을 접한다. 

극중에서 그는 사후세계의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영화는 이 부분에서 초현실적인 서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작은 배를 타고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곳의 책꽂이는 몹시 높고 거대하다. 사람들의 인생이 기록된 수만권의 책들이 끝없이 꽂혀 있고, 이용자들은 서가 사이를 날아다니며 책들을 본다. 책들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며,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사후세계의 서가는 관객들에게 웅장함과 경탄을 전달한다. 


사람들의 인생을 책에 정리해서 그 책들을 책꽂이로 정리해 보관하고 있다는 발상은, 그 서가가 갖는 강력하고 묵직한 가치를 내포한다. 사후세계의 '책꽂이'가 표현하는 압도적인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몇 줄로 표현되는 인생과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소중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랑, 기쁨, 슬픔, 고통...책에 쌓인 인생의 나이테는 책 페이지 하나하나를 채우고, 낱장들이 묶여 커다란 책이 되고, 책들이 바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은 책들이지만 빼들어 읽노라면 이 얼마나 다르고 각각의 삶이 치열한지. 빈센트 워드 감독이 구현한 거대한 서가의 이미지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토록 가까웠던 책꽂이

내 방의 책꽂이는 다양한 책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어린시절의 앨범, 10대 시절 샀던 만화책과 DVD도 있고, 좋아했던 과목의 교과서도 있다. 그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 있게 한다. 내 역사와 마주보게 도와주는 거대한 프레임. 책꽂이는 그렇듯 나와 가까웠던 것이다.

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책꽂이를 등장시킨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이 무엇을 입고, 먹는지에 관한 문제만큼이나 '책장'의 등장은 집중할만한 문제다. 책꽂이란 단순히 책 제목이 적힌 책등의 합으로 이루어진 파사드가 아니라, 시간뭉치들을 정성스레 안고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책장, 오늘 한번 마주치는 것은 어떨지.  


최민정_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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