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tel, acrylic on canvas, 112.1x145.5cm, 2007
 
벽제의 밤은 붉은 가로등 빛으로 불타고 있다. 탁도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 위를 유영하는 오리를 해병전우회 남자들이 바라보고 있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조야한 꽃장식 조형물이 야간 조명을 받아 초현실적인 모습으로 빛나고 있다. 공성훈의 그림에서 익숙한 주변의 풍경들에 드리워진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은 친밀함에 버무려진 역설의 흔적이며, 과장되거나 전도된 색상은 정밀한 윤곽 이면에서 암약하는 생경한 현실의 표현이다.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매체와 기술을 넘나들며 자유로운 표현을 견지했던 공성훈이 갑자기 캔버스 유화에 몰입하기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났다. 재현의 대상은 변했으나 원색조의 회화가 뿜어내는 기이한 풍경의 원칙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야음을 틈타 배회하는 공성훈의 캔버스에서 탐욕의 광풍이 휩쓸고 간 흔적들이 기묘한 법칙으로 변하여 존재하고 있다.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다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한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설치 작품들을 선보여왔지만, 당신의 작품에서 하이테크놀로지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은 미디어를 활용한 작품을 하기 위해서였는가?
 
작품에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의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적한 대로 전자공학도로서의 숙련도가 요구되는 하이테크놀로지 작품은 없었다. 대개의 내 작품들은 로텍(Low-tech)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내가 아날로그적 기계 미학에 끌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딛고 있는 곳에 대한 의심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적절한 근대화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성급히 현대로 접어든 곳에서 살고 있다. 강압적으로 이식된 기계 문명의 완성품 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과정의 미학들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망을 늘 갖고 있었고, 이것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현대미술에 대해 내가 늘 품고 있었던 어떤 불만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나는 내가 딛고 있는 미술이라는 영역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증적이고 논리적인 모색의 과정이 없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추상적 수사들에 동시대 미술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뭔가 구체적인 것부터 미술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다. 미술의 외형으로서의 물질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선택한 과정이었다. 예술은 현실의 논리로 재단할 수 있는 인식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그 초월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모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뜬구름처럼 흘러다니는 개념들을 마구잡이로 이용하는 것은 결국 개념의 착취에 불과하다.


A Man Taking A Picture, acrylic on canvas, 130.3x193.9cm, 2008


A Tree, oil on canvas, 79.5x99.5cm, 2008
   
1991년 블라인드 작업부터 시작하여 슬라이드 프로젝션 연작들까지, 회화로 방향을 바꾸기 전 당신의 작업들은 실로 다양했다. 목탄 드로잉부터 전자 매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작품을 완성해왔다. 형식적 정체성을 아예 배제한 흔적마저 나타난다.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 나는 작가라기보다는 미술 관계자로 자칭하고 다녔다. 소위 대문자 A로 시작하는 미술에 시비를 걸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작품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외부의 시선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표현하기보다는 발언하기를 원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분류되고 범주화되는 감각적 스타일을 피해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작업의 기저에 있는 내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정체성이라고 하는 고정된 구조가 있는 것인지 하는 의심이 있었다. 변하지 않는 내적 구조를 확립하며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불안정한 상황에 반응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시비라는 측면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한 것인가?
 
그런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늘 낯설게만 보이는 예술이나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문제를 계속해서 다뤄왔던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자본의 엄청난 물결이 휘몰아치는 상황이었고, 미술계 속으로도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되던 시기였다. 미술의 상품화와 제도 권력의 파워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고, 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토대의 안락함을 즐기기도 했다. 반면에 이제 막 작가로서 출발한 나에게는 그런 현실이 거부감이 들었을 뿐 아니라, 나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진부한 것들의 맥락을 바꾸는 작업들도 그런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돌이켜 보면, ‘제도로서의 미술’에 강한 시비를 걸었다기(infighting)보다 거리를 두고 딴죽을 건(outfighting) 측면이 강했던 것 같다.
 
2000년 개인전에서 회화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 전까지 당신에겐 - 동의하진 않았지만 - 이른바 ‘미디어 아티스트’나 ‘테크놀로지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갑자기 회화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90년대 후반부터 회화로 방향을 바꾼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미술에 시비를 건 결과가 내가 원하는 만큼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건 시비들이 다른 시비들을 양산하면서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는 걸 원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시비조차 너무나 손쉽게 수용되고 제도화 되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제대로 비판의 칼날을 날리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찢어진 청바지가 뜻하는 반항의 메시지가 첨단의 패션 트렌드로 인식되어 처음부터 찢어진 상태로 팔리고 있는 상황과 비슷했다.
 
당시 미술계에서 미디어를 이용한 설치는 젊은 작가들이 시도해야 할 주류적인 방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내용과 태도의 문제보다 차가운 매체 미학의 신선함이 더 멋진 것으로 여겨졌고, 비엔날레나 대형 기획전 등을 통해서 하나의 유행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매체를 이용한 설치 작업의 직설적 화법이 더 이상 내게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상황과 맥락을 설정해 놓으면, 그 이후의 모든 과정은 정밀하게 설계된 과정을 따라야 하는 그 예측 가능함에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명확한 상황에서 모호성으로의 회귀를 원했고, 그 불투명한 과정 자체를 즐기고 싶어졌다.
 
결국 회화로의 이동은 내적 상황의 변화에 의한 것인가?
 
내적인 상태의 변화와 외적 환경의 변화, 둘 다 이유가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거주지를 벽제로 옮겼는데, 주로 낮엔 강의를 했고 밤시간에야 집에 있었다. 집 근처의 밤풍경은 변두리적 감수성을 가진 나에게조차도 매우 생경한 것이었다. 사실 한국의 사회적 현실은 그 어떤 예술보다 더 자극적이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화장터와 모텔촌이 병존하는 벽제야말로 가장 강렬한 자극을 내뿜는 곳이었다. 그곳은 서울에서 밀려나 부유하는 사람들의 거친 콤플렉스가 난무하고, 비루한 삶의 피곤함이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곳이었다. 마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실로 봉합한 부분의 가장자리가 터져 있는 흔적을 보는 느낌이었다. 매일 밤 직면하는 그 강렬한 풍경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매체로 나는 회화를 생각했다.
 
회화를 다시 시작한 후 작업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처음에는 집 근처의 밤풍경을 주로 그렸고, 나중에는 읍내의 풍경이나 더 먼 곳을 그려나갔다. 사실 나는 풍경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적이 없다. 내 시선을 잡아끄는 주변의 풍경을 그릴 뿐이다. 후에 일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호수공원이나 일산으로 가는 길 위의 풍경 같은 것들도 그렸다. 밤이 아니라 낮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철원이나 울산 앞바다와 같은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대상이 바뀌면서 붓의 기법도 바뀌었다. 일단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기술이 늘기도 했고, 대상의 윤곽선에 따라 더 정밀한 붓터치를 사용했다. 그림에서 등장하는 요소들도 더 많아졌고, 보다 구체적으로 변했다. 최근에는 더 눈이 나빠지기 전에 정밀한 세필 작업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회화로 방향을 바꾼 후 ‘벽제의 밤’이나 ‘교외의 밤’ 연작들에서는 풍경 이면에 내재한 어떤 구조나 흔적 같은 것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이후 ‘근린 자연’ 연작들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보다 적어지는 것 같고, 최근의 ‘겨울 풍경‘ 연작들에서는 급기야 인공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인공적 풍경에서 자연적 풍경으로 관심이 변화한 것인가?
 
자연적 풍경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낭만주의적 풍경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울산 앞바다를 그린 작품들은 학생들과 여행을 갔던 울산의 스산한 날씨와 풍경에 강한 자극을 받아서 시도한 것들이다. 특히 그것들은 좁은 면적의 상업화랑에서 하는 개인전에 출품되는 것들이었는데, 나는 내가 전시할 장소에 어느 정도 타협할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린 자연적 풍경들도 인공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당신의 그림은 탁월한 감각과 고도의 회화적 숙련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른바 이발소 그림들에게서 보이는 자극적인 색상들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러한 기법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법의 문제를 떠나 내용이 그렇게 변했을 때 통속화의 전형성을 갖추게 되어버릴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통속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들이 겹치는 지점을 잡아내고 싶었다. 내 작업이 통속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없다. 사실 내가 그리는 대상들이라는 게 대부분 변두리적 삶의 흔적들인데, 그것 자체가 고급은 아니지 않은가? 통속화의 감수성이야말로 삶의 낭만적 풍경에 어울리는 것 같다. 나의 그림은 내가 두 발로 딛고 있는 이 지면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지지고 볶는 통속성, 그 속에 숨어있는 욕망과 허위 그리고 허영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인터뷰 I 공성훈 X 고원석 (공간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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