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공간 500번의 기록

100호  1975년 9월호
“설사 등사판을 가지고 손수 긁는 한이 있더라도” _ 김수근

끝으로 100호를 내면서 한마디 더 해야 될 말이 있습니다. 그간 공간지를 위해서 박봉에도 불구하고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해주신 분들, 또한 싼 원고료에도 불구하고 귀한 원고를 아낌없이 보내주신 필자 선생님들, 그리고 애독자 여러분에게 지면으로나마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미 치룬 행사이지만 100호를 기념하는 공간미술대상에 작품을 기증해 주신 화가선생님들에게 아울러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그 보답의 뜻으로 나는 이렇게 결의를 표합니다.


설사 등사판을 가지고 손수 긁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은 계속 발행하겠다는 것입니다.

10주년 특집  1976년 12월호
공간창간 10주년 특집 _ 한국예술의 10년
미술 - 변화와 모색 그리고 실험
건축 - 해야할 일 너무 많은 시대의 건축
음악 - 새로운 풍토를 향하여… 전망은 밝다
연극 - 전환점에 선 한국연극
특별자료의 공개 - 조선총독부청사 신축 전말

200호  1984년 2월호
되돌아갈 수 없는 길에서 _ 김수근

창간 당시 공간은 건축 잡지로서 출발했다. 그 후 차차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아울러 각 예술분야를 폭넓게 수용하는 종합예술 잡지가 되었는데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필연적이었다.

오늘날, 건축을 포함해 문화예술 각 분야는 더 많이 전문화해 가면서도 필연적인 상호 연관성을 점점 더 갖고 있다. 건축과 회화, 건축과 음악, 미술과 연극,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은 오늘에 있어야 할 한국 문화를 형성하는데 피와 살 같은 연관성을 상호간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었던 전통적인 것이나, 현재 있는 가치 있는 현상들, 그리고 앞으로 예견되는 미래지향에의 가능성 등을 통해서 현대의 한국인이 지녀야 할 안목을 길러가자는 것이 잡지 공간이 되새겨온 지향점 이었다.


이제 200호를 내면서 앞으로 다시 200호를 더한 400호가 나올 날이 언제인가를 살펴보니 2000년 가을이 된다. 200호를 만드는 오늘이나 더욱 발행호수를 거듭할 내일의 길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공간은 이제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사람은 바뀌어도 공간은 더 오래 좋은 잡지로서 있어지기를 더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작으나마 전통은 그렇게 축적되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령 200호 남사당 놀음으로 자축
1984년 5월 27일에는 200호를 기념해 경기도 파주군 공릉 숲속의 공간 마당극장에서 남사당 굿판을 벌였다. 이것은 꼭두각시놀음, 살판뜀(땅재주)등 6마당의 남사당 놀음을 14년 만에 모두 재연한 것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공간 잡지, 공간미술관, 소극장 공간사랑, 공간연구소(설계실)이 한 자리에 모인 당시의 공간 그룹을 두고 고 김수근은 “세계 유일의 종합 공간예술연구소”라고 자부했다.

당시 200호에서는 건축, 미술, 음악, 연극 등 4개 분야에 걸친 특집 좌담회를 싣고 ‘8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의미론’, ‘우리에게 근대 건축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국음악의 영역표제 가능성’, ‘한국연극의 현재적 상황과 진로’라는 주제를 나누기도 했다.

300호  1992년 9월호
모더니즘은 과연 끝났는가 _ 장세양

금번 300호를 맞이하는 공간지는 창간 이후 26년의 짧고도 긴 시간을 예술의 종합적 사고와 발견을 주된 책의 방식으로 담아오면서 그 시대를 꿰뚫어보고 과거의 좋은 것을 현재에 되새기고 앞으로 있어야 할 바람직한 미래를 예시한다는 공간지의 기본 성격을 견지하면서 이전까지의 무브먼트적이며 데몬스트레이션적인 태도와 함께 모더니즘의 정반합에 의한 제3세대의 출현을 실현시키는 것이 이 시대의 소명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결국 오늘의 공간지가 맞는 변증법적 모더니즘의 시대적 요청이며, 그것이 공간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는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_ 장세양

개인적으로는 미술평론가로서의 성장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되며, 무엇보다 미술이란 좁은 영역을 벗어나 예술의 종합성에 눈뜨게 되었다는 것이 공간이 내게 준 혜택이 아니었나 본다. 공간은 출범부터 건축을 중심으로 미술과 그 주변 예술을 포용하는 성격을 띄었으며, 이러한 종합지 성격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유일한 종합예술지인 셈이다. 그리고 잡지가 갖는 시사성, 일회성을 벗어나서 자료로서의 지속성을 갖는 내용, 무엇보다도 한국고유의 미의 발견, 한국예술의 우수성을 고찰하는 내용은 국내외를 통해 주요한 자료로서 국내외를 통해 주요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_ 오광수

400호  2001년 3월호
400호를 맞아 공간사는 2001년 3월 16일(금) 저녁 6시 30분부터 공간사옥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한 잡지가 400호를 발간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크게 기념할만한 일로, 일련의 축하 이벤트는 자축의 의미를 넘어 SPACE지가 갖는 대내외적인 이미지를 제고하고 미래의 공간상을 제시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에 공간사는 2001년 3월 7일 <Press Open House>를 시작으로 3월 16일 축하의 밤 행사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다채로운 이벤트를 진행했다. 먼저, 이 기간 동안 공간사옥 내외부에 청사초롱을 달아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새로운 공간 CI를 부착했다. 또한 400호 발간을 기점으로 오픈하는 웹진 vmspace를 알려 그 역사와 의미를 외부에 알렸다. 이는 새로운 세대에 발 맞추고 그간 지속해온 외국건축가의 현지 취재를 활성화시키며 축적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등 웹과 지면을 통한 공간지의 재도약과 변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3월 16일 SPACE지 400호 발간 기념 축하의 밤 <SPACE VISION 2001> 행사에는 그동안 SPACE지와 함께 해온 건축가, 학자 등은 물론이고 공간과 관련된 많은 인사들이 참석해 자리를 함께 했다. 공간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며 공간그룹과 인연을 맺은 탤런트 박상원 씨가 사회를 맡았으며, 기념사, 내빈축사, 관계자 감사패 전달 등의 공식행사와 이애주 씨의 <살풀이 공연>, 김대환씨의 <대북 공연> 등 축하공연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행사가 신관과 구관 사이 공간에서 펼쳐졌다.
 

400호에서는 황일인(전 한국건축가협회장), 김성구(샘터 발행인), 이기웅(열화당 대표), 이의구(전 대한건축사협회장) 씨 등이 400호를 축하하는 글을 싣고 공간지의 역사와 함께한 김원, 윤승중, 황일인 세분의 건축가가 참여해 기념좌담을 가진바 있다.

40주년 2006년 11월
아직 40년밖에 되지 않았다 _ 이상림

2009년이면 「공간」은 500호를 발행하게 됩니다. 또 2010년이면 공간그룹 창립 50주년이 됩니다. 국내에서 “건축 전문지로서 위상을 굳건히 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더 열심히 하라는 질타 이상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공간」은 국내의 비슷한 잡지끼리 제한된 독자와 한정된 시장에서 그나마 많지 않은 건축가와 콘텐츠 생산자를 두고 경쟁하는 것과 같은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벗어나 차별화된 내용으로 본질을 탐구하는 잡지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희는 몇 년 전부터 몇 가지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우선 양적인 팽창과 외형의 자랑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둘째, 너무 많은 광고로 잡지 본연의 내용을 오도하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광고는 필요한 곳에 실어 책 자체가 갖는 품위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셋째, 우리 시대의 건축과 예술을 기록하고 진지한 고민을 함께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잡지사는 항상 어려워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뜨거운 정열과 시간을 쏟고 있는 많은 젊은 인재들이 일의 성취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에서도 당당하고 보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중략) 무엇보다 지난 40년을 우리들 가슴속에 있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시간의 무게에 휘둘리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안주하지 않는 「공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