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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역사를 보여주마 - 책꽂이에 관하여
정기적으로 버리지 않는 이상 조금씩이라도 불어나는게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떤 종이뭉치들'은 시간을 두고 점점 늘어난다. 전자제품을 사게 되면 설명책자가 딸려온다. 동네의 중국집과 치킨집의 전화번호들이 정리되어 있는 자그만 전화번호부도 어딘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여행 떠난다고 샀던 지도책이나, 학교 졸업앨범, 영어사전, 이면지 뭉치들과 A4 클리어파일, 명함 정리집 등이 책장 귀퉁이에 있다. 심지어는 CD나 DVD도 있을 것이다. 책꽂이는 방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창고며 친구다. 그 방의 가장 눈에 띄는 존재이며 가장 눈에 안 띄는 존재이기도 하다. 방의 벽이자 독립적인 공간이다. 확실히 말해 '책꽂이', 혹은 '책장'은 '내 방'을 '내 방'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몇몇 소설과 영화 속에서 '책꽂이'는 재미난 역할을 한다. 주인공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계획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며, 작품 속 세계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어떤 소설을 가장 그 소설답게 만들어주었던 책꽂이. 그 영화의 한 장면을 가장 그 영화스럽게 드러낸 책장. 처음에는 내 방의 책꽂이처럼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다시 그 작품을 들여다 보면서, 재기 넘치는 여러 형태의 책장과 책궤, 책을 놓아두는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와이 슈운지의 대표작 <러브레터>는 어떠한가? 부옇고 밝게 빛나는 도서관 창가와 남자배우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다. 몇 년전 개봉했던 영화 <범죄의 재구성>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등 여러 한국영화에도 멋진 서가가 등장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과 서가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인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은 읽는 내내 독자들이 중세 장서관의 책꽂이 이미지를 상상하게끔 하고,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높고 웅장한 서가는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책꽂이를 이야기하자면 서재나 도서관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되지만 그 부분은 추후 거론하기로 하고, '책장, 책궤, 서가'에 관해 수다 떨 수 있는 세 작품을 골라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소설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소설 <바람의 화원>의 작가 이정명은 2006년 블록버스터급 한국형 팩션(Faction) <뿌리 깊은 나무>를 선보였었다. <누가 왕의 학사를 죽였는가>라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공연될 만큼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작품으로, 한글 창제의 숨은 이야기를 빠른 전개와 치밀한 구성으로 보여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글과 경복궁,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금서'를 보관하는 비서고에 신기한 책장이 등장한다.
......
내가 빅터 삼촌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것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
극중에서 그는 사후세계의 도서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영화는 이 부분에서 초현실적인 서가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작은 배를 타고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곳의 책꽂이는 몹시 높고 거대하다. 사람들의 인생이 기록된 수만권의 책들이 끝없이 꽂혀 있고, 이용자들은 서가 사이를 날아다니며 책들을 본다. 책들은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니며,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사후세계의 서가는 관객들에게 웅장함과 경탄을 전달한다.
사람들의 인생을 책에 정리해서 그 책들을 책꽂이로 정리해 보관하고 있다는 발상은, 그 서가가 갖는 강력하고 묵직한 가치를 내포한다. 사후세계의 '책꽂이'가 표현하는 압도적인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몇 줄로 표현되는 인생과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소중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랑, 기쁨, 슬픔, 고통...책에 쌓인 인생의 나이테는 책 페이지 하나하나를 채우고, 낱장들이 묶여 커다란 책이 되고, 책들이 바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똑같은 책들이지만 빼들어 읽노라면 이 얼마나 다르고 각각의 삶이 치열한지. 빈센트 워드 감독이 구현한 거대한 서가의 이미지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토록 가까웠던 책꽂이
내 방의 책꽂이는 다양한 책들을 정리해주고 있다. 어린시절의 앨범, 10대 시절 샀던 만화책과 DVD도 있고, 좋아했던 과목의 교과서도 있다. 그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갈 수 있게 한다. 내 역사와 마주보게 도와주는 거대한 프레임. 책꽂이는 그렇듯 나와 가까웠던 것이다.
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책꽂이를 등장시킨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이 무엇을 입고, 먹는지에 관한 문제만큼이나 '책장'의 등장은 집중할만한 문제다. 책꽂이란 단순히 책 제목이 적힌 책등의 합으로 이루어진 파사드가 아니라, 시간뭉치들을 정성스레 안고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평소 무심히 지나쳤던 책장, 오늘 한번 마주치는 것은 어떨지.
글 최민정_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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