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일본에서 ‘호타루의 빛2’가 첫 방영된다고 했을 때 난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친구에게 애원했다. 벗아 벗아 나에게 1화를 보내주렴 – 참고로 현재 난 다운로드 속도가 한국의 10%정도되는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 – 절친한 나의 친구는 “시간 되면”이라는 말로 바쁜 척 메신저에서 사라졌다. 나쁜 자식. 왜 나는 일드 하나에 이리도 열광하고 비굴하게 구는 것일까. 3년 전, ‘호타루의 빛1’을 보며 가슴을 치며 외쳤기 때문이리라. 저건 나여. 나인 것이여.

‘호타루의 빛’이 일본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작년에서야 한국에서 신용어로 대두되었다. 바로 ‘건어물녀’. (일본에서는 2007년에 쓰인 용어가, 2009년에 한국에 상륙하다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고) 직장이나 사회에서는 샤방샤방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지만, 알고보면 집에 가서 츄리닝에 머리 틀어올리고, 연애에도 관심없어서 정서상으로 말라비틀어진 여자주인공을 ‘건어물녀’라 부르는 것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건어물녀’ 정서가 날 감동시키진 않았다. 사실, 용어상 정의가 이제야 되었을 뿐이지 집에 가서 ‘건어물녀’가 아닌 상태로 있는 2,30대 직장여성이 얼마나 있나. 집에 오면 무조건 번데기 허물 벗듯 훌훌 벗어 던지고, 가장 편한 옷을 착용한 후 화장부터 지우는 게 순서 아니던가. (난 술이 떡이 되서 들어와도 이 순서를 무시할 순 없다.)



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호타루의 빛’을 보며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툇마루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자 관계를 만들어주는 장치라 볼 수 있다. 더 이상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툇마루에 앉아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는 여주인공을 보며 군침을 꼴딱거리며 부러워했음을 인정한다. 여자주인공이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편한 추리닝차림으로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뒹굴거리는 것만 봐도 뭔가 대리만족을 느꼈다. 1화에서 호타루가 처음으로 작은 연못이 있는 정원과 툇마루까지 있는 집에 들어서며 집주인에게 전화로 말한다. “이 곳이라면 힘내서 일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안심할 수 있어요,”라고. 그 대사와 함께 내 머리에서 딩-. 종이 울렸다. 자신에게 안심을 주는 곳이라, 이 보다 완벽하게 집을 표현하는 말이 어딨나. 게다가 이 집은 내가 꿈꾸던 나무향이 날 것 같은 툇마루가 있는 주택이다. ‘호타루의 빛’에서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집 그리고 툇마루에서 이뤄진다.



어린 시절, 주택에서 살던 나에게도 정원과 툇마루에 대한 추억이 있다. 여름낮, 정원 나무에서 맴맴 거리던 매미나, 겨울 새벽에 눈 내리는 소리를 첫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던 따뜻하고 정겨운 기억이 있다. 그러나 20살에 상경하는 순간, 주택은 고사하고 몸을 뉘일 곳이 있으면 다행이었다. 대학교 졸업반 여름, 한 몸 겨우 뉘일 수 있었던 지글지글 끓고 있는 하숙방에서 얼린 수건을 목에 감싸며 기필코 성공해서 손바닥만한 정원이라도 주택을 사겠다고 결심했었다. 취업을 하고 나의 경제적 능력은 급성장(?)하여 신도시 오피스텔로 바뀌었으나 정원이 있는 집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다. 아무리 쾌적하고 편리해도, 원할 때면 언제나 내가 내키는 대로 있을 수 있지만, 밖을 보면 빽빽한 아파트 건물뿐임에 서글플 따름이었다.

내일 모레가 서른인 지금도 난 정원이 있는 집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산다. 여전히 추리닝차림에 뒹구는 ‘건어물 아줌마’지만, 직장에서 돌아올 수 있을 때 완벽히 안심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건어물녀든, 건어물녀가 아니든, 누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받아주고, 도닥거려주는 공간이 필요하다. 오늘같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는 여름이면 그 곳에 가고 싶다. 호타루가 앉아있던 그 툇마루로, 그녀가 부채질하며 이렇게 말해 주길 바라면서 – “우리, 맥주 마실래요?” 
 
고은영 ㅣ 진행 이경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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